윌프리드 로리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윌프리드 로리에는 1841년 퀘벡주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874년 연방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 1887년부터 1896년까지 자유당 대표를 역임했다. 1896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캐나다의 제7대 총리가 되었으며, 1911년까지 15년간 재임했다. 로리에는 매니토바 학교 문제 해결, 철도 건설, 이민 정책 등 다양한 국내 정책을 추진했으며, 영국과의 관계, 알래스카 국경 분쟁, 관세 및 무역 문제 등 외교 정책에도 힘썼다. 그는 1911년 상호 호혜 문제로 선거에서 패배한 후에도 야당 대표로 활동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징병제에 반대하다가 1919년 사망했다. 로리에는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캐나다인 사이의 화합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캐나다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캐나다의 총리 -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의 제15대 총리인 피에르 트뤼도는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거쳐 법무장관을 역임하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총리 재임 시절에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헌법 개정을 통해 캐나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으며, 그의 장남 쥐스탱 트뤼도 또한 캐나다의 총리를 역임했다. - 캐나다의 총리 -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은 캐나다의 최장수 총리로서 세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하며 관세 인하, 자치권 확대, 노인 연금 도입,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캐나다 복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 캐나다의 로마 가톨릭교도 -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의 제15대 총리인 피에르 트뤼도는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거쳐 법무장관을 역임하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총리 재임 시절에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헌법 개정을 통해 캐나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으며, 그의 장남 쥐스탱 트뤼도 또한 캐나다의 총리를 역임했다. - 캐나다의 로마 가톨릭교도 - 폴 마틴
캐나다의 제21대 총리인 폴 마틴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재임하며 재정 적자 감소에 기여하고 동성 결혼 합법화를 이끌었으나, 후원금 스캔들과 소수 정부 운영의 어려움, 그리고 미국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 참여 거부 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1841년 출생 -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7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웨일스 공으로 오랜 기간 지내다가 1901년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외교에 힘쓰고 9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다 사망했다. - 1841년 출생 - 귀스타브 르 봉
귀스타브 르봉은 프랑스의 다방면 저술가로, 특히 『군중 심리』를 통해 사회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인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윌프리드 로리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앙리 샤를 윌프리드 로리에 |
출생일 | 1841년 11월 20일 |
출생지 | 생린로랑티드, 캐나다 동부, 캐나다 연합 주 |
사망일 | 1919년 2월 17일 |
사망지 | 오타와, 온타리오주, 캐나다 |
안장지 | 노트르담 묘지 (오타와), 오타와, 온타리오주 |
정당 | 자유당 |
기타 정당 | 로리에 자유당 (1917–1919) |
배우자 | 조에 라퐁텐 (1868년 결혼) |
교육 | 맥길 대학교 (법학사, 1864년) |
직업 | 변호사 |
![]() | |
군 복무 | |
소속 | 캐나다 |
군종 | 캐나다 민병대 |
복무 기간 | 1869–1878년 |
계급 | 엔사인 |
부대 | 아타바스카빌 보병 중대 |
전투 | 페니언 습격 |
정치 경력 | |
직위 | 캐나다 총리 |
임기 시작 | 1896년 7월 11일 |
임기 종료 | 1911년 10월 6일 |
군주 |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
총독 | 애버딘 백작 민토 백작 그레이 백작 |
전임자 | 찰스 터퍼 |
후임자 | 로버트 보든 |
정당 대표 | |
직위 | 자유당 대표 |
임기 시작 | 1887년 6월 2일 |
임기 종료 | 1919년 2월 17일 |
전임자 | 에드워드 블레이크 |
후임자 | 대니얼 던컨 매켄지 (임시) |
정부 부처 장관 | |
직위 | 내국세입부 장관 |
임기 시작 | 1877년 10월 8일 |
임기 종료 | 1878년 10월 8일 |
전임자 | 조제프 에두아르 코숑 |
후임자 | 루이 프랑수아 조르주 베이비 |
국회의원 | |
선거구 | 퀘벡 이스트 |
의회 | 캐나다 |
임기 시작 | 1877년 11월 11일 |
임기 종료 | 1919년 2월 17일 |
전임자 | 이시도르 티보도 |
후임자 | 어니스트 라포인트 |
선거구 | 드러먼드-아타바스카 |
의회 | 캐나다 |
임기 시작 | 1874년 1월 22일 |
임기 종료 | 1877년 10월 27일 |
전임자 | 피에르-네레 도리옹 |
후임자 | 데지레 올리비에 부르보 |
주의회 의원 | |
선거구 | 드러먼드-아타바스카 |
임기 시작 | 1871년 7월 |
임기 종료 | 1874년 1월 22일 |
전임자 | 에드워드 존 헤밍 |
후임자 | 윌리엄 존 와츠 |
2. 초기 생애 (1841–1871)
앙리 샤를 윌프리드 로리에[1]는 1841년 11월 20일 캐나다 동부(오늘날의 생린로렌티드(Saint-Lin-Laurentides), 퀘벡주)의 생린(Saint-Lin)에서 카롤루스 로리에(Carolus Laurier)와 마르셀 르 마르티노(Marcelle Martineau)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자 6대째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다.[1] 그의 조상인 프랑수아 코티노(François Cottineau, dit Champlaurier)는 프랑스의 생클로드(Saint-Claud)에서 캐나다로 왔다.[1]
로리에는 정치가 일상적인 대화와 논쟁의 주제였던 가정에서 성장하였다.[1]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교육받은 그의 아버지는 농부이자 측량사였고, 마을에서 시장, 치안판사, 민병대 중위, 그리고 학교 이사회 위원과 같은 요직을 역임하며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1]
11세에 윌프리드는 주로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인근 마을인 퀘벡주 뉴글래스고(New Glasgow)로 이사하여 공부를 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것 외에도 영국계 캐나다의 사고방식, 언어, 문화에 익숙해졌다.[1] 1854년, 로리에는 엄격한 로마 가톨릭 신앙을 따르는 콩콜 드 라송프시옹(Collège de L'Assomption)에 입학하여 정치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고, 학교가 매우 캐나다 보수주의 성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자유주의 이념을 지지하기 시작했다.[1]
1861년 9월, 로리에는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하여, 훗날 그의 아내가 될 조에 라퐁텐(Zoé Lafontaine)을 만났다.[1] 그는 만성 기관지염(bronchitis)을 앓고 있었지만,[1] 중도좌파 정당인 파르티 루주(적당(Red Party))에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1][2] 1864년 맥길대학교 졸업 후, 몬트리올 캐나다 연구소(Institut canadien de Montréal) 부회장을 역임하며 하부 캐나다 자유당에 합류, 연방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1]
로리에는 몬트리올(Montreal)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지만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1] 1866년, 앙투안-에메 도리옹(Antoine-Aimé Dorion)의 제안으로 신문 ''르 데프리슈르(Le Défricheur)''의 편집자 겸 운영자를 맡아 반연방주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1] 1867년 ''르 데프리슈르''는 재정 문제와 지역 성직자(clergy)의 반대로 폐간되었다.[1] 같은 해, 로리에는 빅토리아빌(Victoriaville)로 이주하여 시장으로 선출되고 법률 사무소를 설립하며 지역 사회에서 명성을 얻었다.[1] 이 시기에 로리에는 온건 자유주의자로 전향하며 연방제를 수용하게 되었다.[1] 빅토리아빌에 있는 동안 로리에는 아르타바스빌 보병대 소대의 소위였으며,[3] 페니안 침공(Fenian Raids) 기간 동안 1869년부터 1878년까지 복무했다.[4]
1877년 10월, 퀘벡시티에서 자유주의 정치에 관한 연설을 한 후, 알렉산더 맥켄지 내각에 내국세입 담당 장관으로 입각했다.[66]
2. 1. 유년 시절
앙리 샤를 윌프리드 로리에[1]는 1841년 11월 20일 캐나다 동부(오늘날의 생린로렌티드(Saint-Lin-Laurentides), 퀘벡주)의 생린(Saint-Lin)에서 카롤루스 로리에(Carolus Laurier)와 마르셀 르 마르티노(Marcelle Martineau)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자 6대째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다.[1] 그의 조상인 프랑수아 코티노(François Cottineau, dit Champlaurier)는 프랑스의 생클로드(Saint-Claud)에서 캐나다로 왔다.[1]로리에는 정치가 일상적인 대화와 논쟁의 주제였던 가정에서 성장하였다.[1]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교육받은 그의 아버지는 농부이자 측량사였고, 마을에서 시장, 치안판사, 민병대 중위, 그리고 학교 이사회 위원과 같은 요직을 역임하며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1]
11세에 윌프리드는 주로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인근 마을인 퀘벡주 뉴글래스고(New Glasgow)로 이사하여 공부를 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것 외에도 영국계 캐나다의 사고방식, 언어, 문화에 익숙해졌다.[1] 1854년, 로리에는 엄격한 로마 가톨릭 신앙을 따르는 콩콜 드 라송프시옹(Collège de L'Assomption)에 입학하여 정치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고, 학교가 매우 캐나다 보수주의 성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자유주의 이념을 지지하기 시작했다.[1]
2. 2. 정치 입문
1861년 9월, 로리에는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하여, 훗날 그의 아내가 될 조에 라퐁텐(Zoé Lafontaine)을 만났다.[1] 그는 만성 기관지염(bronchitis)을 앓고 있었지만,[1] 중도좌파 정당인 파르티 루주(적당(Red Party))에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1][2] 1864년 맥길대학교 졸업 후, 몬트리올 캐나다 연구소(Institut canadien de Montréal) 부회장을 역임하며 하부 캐나다 자유당에 합류, 연방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1]로리에는 몬트리올(Montreal)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지만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1] 1866년, 앙투안-에메 도리옹(Antoine-Aimé Dorion)의 제안으로 신문 ''르 데프리슈르(Le Défricheur)''의 편집자 겸 운영자를 맡아 반연방주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1] 1867년 ''르 데프리슈르''는 재정 문제와 지역 성직자(clergy)의 반대로 폐간되었다.[1] 같은 해, 로리에는 빅토리아빌(Victoriaville)로 이주하여 시장으로 선출되고 법률 사무소를 설립하며 지역 사회에서 명성을 얻었다.[1] 이 시기에 로리에는 온건 자유주의자로 전향하며 연방제를 수용하게 되었다.[1] 빅토리아빌에 있는 동안 로리에는 아르타바스빌 보병대 소대의 소위였으며,[3] 페니안 침공(Fenian Raids) 기간 동안 1869년부터 1878년까지 복무했다.[4]
1877년 10월, 퀘벡시티에서 자유주의 정치에 관한 연설을 한 후, 알렉산더 맥켄지 내각에 내국세입 담당 장관으로 입각했다.[66]
3. 초기 정치 경력 (1871–1887)
1864년, 맥길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몬트리올에서 개업했다. 1866년, 라브니엘로 이주한 후 아사바스카로 다시 이주하여 신문 「르 데프리슈르」를 발행했다. 과격파 파르티 루주를 지지하며 연방화에 강하게 반대했다. 퀘벡주 의회의 드럼몽-아사바스카 선출 자유당 의원이 되었으나, 1874년에 사퇴했다. 이후 연방과 화해하고 캐나다 하원의 자유당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면서 45년에 걸친 오타와 생활이 시작되었다. 1911년 총선까지 당선을 거듭했으며, 1896년부터는 연방 총리가 되었다.
1871년 퀘벡 총선에서 드럼몽-아르타바스카 선거구의 퀘벡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퀘벡 자유당은 선거에서 대패했지만, 로리에는 교육, 농업, 식민지 개척에 대한 재정 지원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었다.[1] 하지만 주의회 의원으로서 로리에의 활동은 미미했으며, 의회에서 연설한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1] 1874년 로리에는 주의회 의원직을 사퇴했다.[66]
1874년 연방 총선에서 캐나다 자유당 소속으로 드럼몬드-아르타바스카 선거구에 출마하여 캐나다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연방 정치에 입문했다.[1] 그는 보수당의 부패를 비난하는 선거 운동을 펼쳤으며,[1] 알렉산더 맥켄지가 이끄는 자유당은 존 A. 맥도널드 총리와 보수당이 연루된 태평양 스캔들 덕분에 압승을 거두었다.[1]
1877년 6월 26일, 로리에는 퀘벡시티에서 약 2,000명 앞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에 관한 연설을 통해 자유당 내에서 명성을 얻었다.[1] 그는 "자유주의적 가톨릭은 정치적 자유주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자유당이 혁명으로 나아가는 정당이 아님을 강조하고, 자유당의 정책은 국가의 잠재적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1] 이 연설은 그가 자유당의 퀘벡 지부 지도자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1]
1877년 10월, 로리에는 알렉산더 맥켄지 내각에서 국세청 장관(Minister of Inland Revenue)으로 임명되었으나,[1]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여 의석을 잃었다.[1] 이후 퀘벡 동부 선거구에 출마하여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고,[1] 1919년 사망할 때까지 퀘벡 동부 선거구를 대표했다.[1] 1878년 연방 총선에서 로리에는 재선되었지만, 자유당은 1873년 공황 대처 실패로 참패했다.[1]
로리에는 맥켄지의 경제 운영을 비판하며 당 대표직 사퇴를 촉구했고,[1] 1880년 에드워드 블레이크가 자유당 대표직을 승계했다.[1] 로리에는 자유당 홍보를 위해 퀘벡 신문 'L’Électeur'를 창간하고,[1] 자유방임주의 경제와 주권 옹호를 통해 야당 의원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1]
1877년 10월, 퀘벡시티에서 자유주의 정치에 관한 활발한 연설을 한 후, 알렉산더 맥켄지 내각에 내국세입 담당 장관으로 입각했다. 고향 퀘벡에서는 가장 뛰어난 자유당 의원이 되었다. 1878년과 1882년 선거에서 자유당은 패배했지만, 로리에 자신은 당선을 거듭했다.
1885년, 로리에는 루이 리엘 처형에 반대하는 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1] 그는 메티스 지도자인 리엘의 주장을 변호하며 프랑스계와 영국계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66] 1887년, 전년도 선거에서 패배한 자유당 당수 로부터 다음 당수로 지명되었다.[66]
3. 1. 퀘벡 주의회 의원 (1871–1874)
윌프리드 로리에는 1871년 퀘벡 총선에서 드럼몽-아르타바스카 선거구의 퀘벡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퀘벡 자유당은 선거에서 대패했지만, 로리에는 교육, 농업, 식민지 개척에 대한 재정 지원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었다.[1] 하지만 주의회 의원으로서 로리에의 활동은 미미했으며, 의회에서 연설한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1] 1874년 로리에는 주의회 의원직을 사퇴했다.[66]3. 2. 연방 하원 의원 (1874–1887)
윌프리드 로리에는 1874년 연방 총선에서 캐나다 자유당 소속으로 드럼몬드-아르타바스카 선거구에 출마하여 캐나다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연방 정치에 입문했다.[1] 그는 보수당의 부패를 비난하는 선거 운동을 펼쳤으며,[1] 알렉산더 맥켄지가 이끄는 자유당은 존 A. 맥도널드 총리와 보수당이 연루된 태평양 스캔들 덕분에 압승을 거두었다.[1]1877년 6월 26일, 로리에는 퀘벡시티에서 약 2,000명 앞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에 관한 연설을 통해 자유당 내에서 명성을 얻었다.[1] 그는 "자유주의적 가톨릭은 정치적 자유주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자유당이 혁명으로 나아가는 정당이 아님을 강조하고, 자유당의 정책은 국가의 잠재적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1] 이 연설은 그가 자유당의 퀘벡 지부 지도자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1]
1877년 10월, 로리에는 알렉산더 맥켄지 내각에서 국세청 장관(Minister of Inland Revenue)으로 임명되었으나,[1]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여 의석을 잃었다.[1] 이후 퀘벡 동부 선거구에 출마하여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고,[1] 1919년 사망할 때까지 퀘벡 동부 선거구를 대표했다.[1] 1878년 연방 총선에서 로리에는 재선되었지만, 자유당은 1873년 공황 대처 실패로 참패했다.[1]
로리에는 맥켄지의 경제 운영을 비판하며 당 대표직 사퇴를 촉구했고,[1] 1880년 에드워드 블레이크가 자유당 대표직을 승계했다.[1] 로리에는 자유당 홍보를 위해 퀘벡 신문 'L’Électeur'를 창간하고,[1] 자유방임주의 경제와 주권 옹호를 통해 야당 의원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1]
1885년, 로리에는 루이 리엘 처형에 반대하는 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1] 그는 메티스 지도자인 리엘의 주장을 변호하며 프랑스계와 영국계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66]
4. 야당 대표 (1887–1896)
에드워드 블레이크는 1882년과 1887년 총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후 자유당 당수직에서 사퇴했다.[1] 블레이크의 권유로 윌프리드 로리에는 자유당 대표직에 도전하여 당선되었다.[1] 로리에는 퀘벡 자유당 지부를 이끌었고,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뛰어난 연설가이자 강력한 국회의원으로 알려져 있었다.[1]
1891년 총선에서 로리에는 보수당 총리 존 A. 맥도널드와 맞섰다.[1] 로리에는 맥도널드와 달리 미국과의 상호관세 또는 자유무역을 지지했다.[1] 맥도널드는 상호관세가 미국의 캐나다 합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1][5] 선거 결과, 자유당은 10석을 얻고 퀘벡에서 다수석을 차지했지만, 맥도널드가 이끄는 보수당이 승리했다.[1][5]
로리에는 패배 후에도 당수직을 유지하며 1893년 오타와에서 자유당 전당대회를 소집했다.[1] 전당대회에서는 무제한 상호관세 정책을 당론으로 확정했으며, 로리에는 전국적인 연설 순회를 통해 지지 기반을 확대했다.[1] 1894년 캐나다 서부를 방문한 로리에는 보수당의 국가정책 완화, 미국 시장 개방, 이민 증가를 약속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1]
1891년 총선에서 로리에를 물리친 존 A. 맥도널드는 3개월 만에 사망했고, 이후 보수당은 혼란을 겪었다.[6] 찰스 튜퍼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1896년 총선에서 매니토바 학교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내세웠으나, 로리에는 '햇살 가득한 방식(sunny ways)'으로 문제 해결을 모색하겠다고 제안하며 승리했다.[6] 로리에의 승리는 퀘벡에서의 압승 덕분이었다.[6]
자유당이 내세운 무제한 상호호혜는 미국과 캐나다가 상호 관세를 철폐하되 정치적 합병은 피하고, 제3국에 대해서는 각자 독자적인 관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다.[71] 1890년 4월 미국 하원에 제출된 매킨리 관세법안은 캐나다산 농산물 수입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자유당에게는 호재가 되었다.[71]
한편, 당시 영국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앵글로색슨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영국 최강의 제국주의자"였는데, 이는 프랑스계인 로리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71] 로리에는 캐나다의 자주적인 내정이 인정된다면 대영제국을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최초의 캐나다인"으로 불렸다.[71] 또한, 식민지는 언젠가 독립하여 본국으로부터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립을 "우리 운명의 북극성"이라고 불렀다.[71]
5. 총리 (1896–1911)
존 A. 맥도널드 사후, 보수당이 곤경에 처한 반면 로리에는 자유당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1893년 오타와에서 진정한 국가 건설과 새로운 강령 승인에 중점을 둔 정치 집회를 열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896년 선거에서는 매니토바주의 가톨릭 소수파의 교육이 쟁점이 되었지만, 로리에는 이솝의 『북풍과 태양』을 비튼 "태양의 방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71],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자유당은 1896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로리에는 연방 총리가 취임했다.[72]
1896년 로리에와 매니토바주 총리인 토마스 그린웨이/Thomas Greenway영어의 회담에서, 로리에는 매니토바 가톨릭 소수파의 교육의 향후 방향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1890년까지 지속되었던 분리학교를 폐지한 후, 수업이 있는 날 방과 후 30분 이내에 한하여 영어 이외의 언어로 종교 교육을 허용하기로 했다.[66] 이는 교묘한 타협안이었지만, 영어·프랑스어 이중 언어주의에 기반한 매니토바법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71]
5. 1. 국내 정책
5. 1. 1. 매니토바 학교 문제
윌프리드 로리에가 총리가 된 직후 첫 조치 중 하나는 1896년 초 찰스 터퍼의 보수당 정부 몰락에 기여했던 매니토바 학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매니토바 주 의회는 가톨릭 학교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을 없애는 법을 통과시켰다. 가톨릭 학교 지지자들은 새로운 법령이 학교 자금 조달에 관한 조항이 있는 1870년 매니토바법(Manitoba Act, 1870)의 조항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그 주장을 기각하고 새로운 법령이 합헌적이라고 판결했다.[7] 매니토바의 가톨릭 소수 민족은 연방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결국 보수당은 매니토바의 법률을 무효화하는 구제 법안을 제안했다. 로리에는 주 권리라는 근거로 구제 법안에 반대하여 의회에서 법안 통과를 막는 데 성공했다. 당선된 후 로리에는 주 총리 토마스 그린웨이(Thomas Greenway)와 타협을 이루었다. 로리에-그린웨이 타협(Laurier-Greenway Compromise)으로 알려진 이 합의는 별도의 가톨릭 학교를 재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10명, 도시 지역에서는 25명의 아동 학부모가 요청할 경우 매일 수업 종료 후 30분 동안 종교 교육(가톨릭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도시 지역에서는 가톨릭 학생이 40명 이상, 농촌 지역에서는 25명 이상일 경우 가톨릭 교사를 고용할 수 있었으며, 프랑코폰 학생이 충분할 경우 교사는 프랑스어(또는 기타 소수 언어)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으로 여겨졌지만, 일부 프랑코 캐나다인들은 이 조치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졌고 모든 학교에서 가톨릭 또는 프랑스어 권리 보호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했다. 로리에는 이 문제의 불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햇살 가득한 방식"(Sunny Ways)(voies ensoleillées프랑스어)이라고 불렀다.[1][8][9]1896년 로리에와 매니토바주 총리인 토마스 그린웨이의 회담에서, 로리에는 매니토바 가톨릭 소수파의 교육의 향후 방향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1890년까지 지속되었던 분리학교를 폐지한 후, 수업이 있는 날 방과 후 30분 이내에 한하여 영어 이외의 언어로 종교 교육을 허용하기로 했다.[66] 이는 교묘한 타협안이었지만, 영어·프랑스어 이중 언어주의에 기반한 매니토바법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71]
5. 1. 2. 철도 건설
로리에 정부는 두 번째 대륙횡단철도인 캐나다 대륙횡단철도(Grand Trunk Pacific Railway) 건설을 제안하고 시작했다. 최초의 횡단철도인 캐나다 태평양 철도(Canadian Pacific Railway)는 한계가 있어 모든 사람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서부에서는 철도가 농민들이 생산한 모든 것을 수송할 수 없었고, 동부에서는 철도가 온타리오주 북부와 퀘벡주 북부에 도달하지 못했다. 로리에는 민간 기업이 전적으로 캐나다 땅에 건설하는 횡단철도 건설을 지지했다.[1]
로리에 정부는 세 번째 철도인 국립 횡단철도(National Transcontinental Railway)도 건설했다. 이 철도는 서부 캐나다에 대서양 항구와의 직접적인 철도 연결을 제공하고 온타리오주 북부와 퀘벡주 북부를 개척하고 개발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로리에는 세 개의 철도 간의 경쟁이 세 개의 철도 중 하나인 캐나다 태평양 철도의 화물 운임을 낮추도록 하여 철도 간 경쟁에 기여할 서부 운송업자들을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로리에는 처음에 그랜드 트렁크 철도(Grand Trunk Railway)와 캐나다 노던 철도(Canadian Northern Railway)에 국립 횡단철도 건설을 의뢰했지만, 두 회사 간에 의견 차이가 발생하자 로리에 정부는 철도의 일부를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로리에 정부는 곧 그랜드 트렁크 철도 회사의 자회사인 그랜드 트렁크 태평양 철도 회사와 서부 구간(위니펙에서 태평양까지) 건설 계약을 맺었고, 정부는 동부 구간(위니펙에서 몬크턴까지)을 건설했다. 완공되면 로리에 정부는 철도를 회사에 인계하여 운영하게 했다. 철도 건설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어 로리에 정부는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10]
서쪽으로 향하는 철도가 신설될 예정이었고, 그랜드트렁크 태평양 철도[71]가 위니펙에서 서쪽 구간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몽크턴과 퀘벡 시티에서 위니펙까지의 노선(내셔널 트랜스컨티넨탈이라고 불렸다)을 건설하려 했다. 캐네디언 노던 철도[71] 건설도 허가했다.[66] 그러나, 이미 토지가 부족했고, 지원은 현금과 철도채의 이자 보증이었으며, 자금은 런던에서 정부 채권 발행으로 충당되었고, 경쟁이 치열했던 탓에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파산을 맞이했다.[71]
5. 1. 3. 주 및 준주 경계
1905년 9월 1일, 로리에는 《앨버타법》(Alberta Act)과 《서스캐처원법》(Saskatchewan Act)을 통해 앨버타와 서스캐처원이 캐나다 연방(Canadian Confederation)에 가입하도록 했다. 이 두 주는 노스웨스트 준주(Northwest Territories)에서 만들어진 마지막 두 주이다. 로리에는 하나의 큰 주는 통치하기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며 두 개의 주를 만들기로 결정했다.[13][14] 이는 1898년 로리에 정부가 노스웨스트 준주에서 유콘을 분리하는 《유콘 준주법》(Yukon Territory Act)을 제정한 데 따른 것이다.[15] 또한 1898년에는 《1898년 퀘벡 경계 확장법》(Quebec Boundary Extension Act, 1898)을 통해 퀘벡이 확장되었다.[16]5. 1. 4. 이민 정책
로리에 정부는 경제 성장을 위해 이민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1897년부터 1914년 사이에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이민자가 캐나다에 도착했고, 캐나다 인구는 40% 증가했다. 로리에의 이민 정책은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농업 산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프레리 지방을 목표로 삼았다.[17]브리티시컬럼비아 유권자들은 캐나다 기준으로 "미개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유입에 경악하여 백인만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철도 회사와 대기업들이 아시아인을 고용하기를 원했지만, 노동 조합과 일반 대중은 반대했다.[18] 두 주요 정당 모두 여론에 따랐고, 로리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9] 학자들은 로리에가 중국과 인도 출신 이민을 제한하는 데 있어 그의 인종차별적 견해에 따라 행동했으며, 중국인 두금세를 지지한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20] 1900년, 로리에는 중국인 두금세를 100달러로 인상했다. 1903년에는 500달러로 추가 인상했지만,[21][22] 몇몇 중국인이 500달러를 지불하자 그는 금액을 1,000달러로 인상할 것을 제안했다.[23] 이것은 로리에가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보인 첫 번째 사례가 아니었으며,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경력 동안 인종차별적 견해와 행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24][25] 1886년, 로리에는 하원에서 정부가 적절한 보상을 지불하는 한 캐나다가 “야만적인 국가들”로부터 땅을 빼앗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말했다.[26] 로리에는 또한 일본의 캐나다 이민 제한에 대해 협상했다.[27]
1911년 8월, 로리에는 내무부 장관인 프랭크 올리버가 추천한 명령원칙 P.C. 1911-1324를 승인했다. 이 명령은 1911년 8월 12일 내각에서 승인되었다. 이 명령은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피해 도망치는 흑인 미국인들을 막기 위한 것으로, "흑인 인종은...캐나다의 기후와 요구 사항에 적합하지 않다고 간주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민 관리들의 노력으로 캐나다로 이주하는 흑인 수가 이미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발동되지 않았다. 이 명령은 로리에가 집권에서 물러나기 전날인 1911년 10월 5일에 내무부 장관이 승인 당시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각에 의해 취소되었다.[28]

5. 1. 5. 사회 정책
1906년 3월, 로리에 정부는 주일 동맹(Lord's Day Alliance)의 설득에 따라 「주일법」(Lord's Day Act)을 도입했으며, 이 법은 1907년 3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은 일요일의 사업 거래를 금지했으며, 일요일의 무역, 노동, 오락 및 신문 발행도 제한했다. 이 법은 조직 노동자와 프랑스계 캐나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제조업 및 운송업 분야 종사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또한 연방 정부가 주 정부 사안에 간섭한다고 믿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퀘벡 주 정부는 연방법보다 하루 앞서 시행되는 자체 「주일법」(Lord’s Day Act)을 통과시켰다.[1][29][30][31]1907년, 로리에 정부는 공공 시설 또는 광산의 파업 전에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조정을 의무화했지만, 당사자가 조정 결과를 수용할 필요는 없도록 하는 「산업 분쟁 조사법」(Industrial Disputes Investigation Act)을 통과시켰다.[1][32]
1908년에는 정부로부터 연금을 구매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어 노령에 대한 자발적인 준비를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3]
5. 2. 외교 정책

1897년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1등급(GCMG, 작위급 훈장)을 수여 받았다.[1] 같은 해 빅토리아 여왕 재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1902년 식민지 회의, 1907년, 1911년 제국 회의에 참석했다.[34]
1899년 보어 전쟁 발발 당시, 영국 정부는 캐나다에 참전을 요청했다.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참전을 지지했으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반대하여 로리에는 갈등을 겪었다. 결국 로리에는 캐나다 민병대가 아닌 자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여 약 7,000명의 캐나다 군인이 참전했다.[35][36] 앙리 부라사는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주의자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캐나다의 보어 전쟁 참전에 강력히 반대하며 1899년 10월 자유당 의원단을 사퇴했다.[35][36]

1909년 6월 1일, 로리에 정부는 캐나다의 외교 정책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외무부를 설립했다.[37]
1910년에는 캐나다 왕립 해군 창설을 위한 해군법을 제정했다. 이는 영국-독일 해군 군비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영국 해군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해군은 처음에 5척의 순양함과 6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며, 위기 시에는 영국 해군에 종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 모두에게서 반대에 직면했다. 특히, 앙리 부라사는 퀘벡에서 반 로리에 세력을 조직하여 반대했다.[1][38]
1897년과 1898년, 알래스카(Alaska)-캐나다 국경 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Klondike Gold Rush)로 인해 로리에(Laurier)는 금광에서 해항까지 전 구간 캐나다 영토를 통과하는 루트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이 금이 풍부한 매력적인 곳이었기에 로리에는 국경을 명확히 설정하려는 야망을 더욱 키웠다. 또한 그는 린 운하(Lynn Canal)의 소유권과 유콘(Yukon)에 대한 해상 접근권을 누가 통제할 것인지도 확립하고자 했다. 로리에와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는 차이점을 연구하고 분쟁을 해결할 영국-미국 합동 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1899년 2월 20일에 돌연 종결되었다.[1]
그 후 분쟁은 1903년 국제 사법 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 여기에는 미국 정치인 3명(엘리후 루트(Elihu Root),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 조지 터너), 캐나다인 2명(앨런 브리스톨 에일즈워스(Allen Bristol Aylesworth), 루이 아마블 제테(Louis-Amable Jetté)) 그리고 영국인 1명(알버스톤 경(Lord Alverstone), 잉글랜드 대법원장(Lord Chief Justice of England))이 포함되었다. 1903년 10월 20일, 위원회는 다수결(루트, 로지, 터너, 알버스톤 경)로 미국 정부의 주장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캐나다는 포틀랜드 운하(Portland Canal)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섬만을 획득했다. 이 결정은 캐나다에서 미국과 영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로리에는 이를 일시적으로 부추겼다.[1][39]
윌프리드 로리에는 미국과의 자유무역을 지지했지만, 미국 정부가 논의를 거부하여 추진하지 못했다.[1][40] 대신 로리에는 보수당의 보호주의적인 국가 정책(National Policy)을 자유당 버전으로 시행하여, 캐나다 상품을 허용하는 국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관세를 인하했다.[1][40]
1897년, 로리에 정부는 캐나다 상품을 최소 캐나다 요금과 동등한 요금으로 수입하는 국가에 대해 12.5%의 관세율을 우대적으로 감면하는 영국 제국 내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자유 무역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다.[1]
1907년, 로리에 정부는 관세 제도를 개혁하여 3단계 관세 제도를 도입했다. 기존의 영국 우대 관세와 일반 관세 외에 중간 관세(협상 관세)를 추가하여, 중간 관세는 일반 관세보다 약간 낮게 책정되었다.[41]
같은 해, 윌리엄 스티븐스 필딩(William Stevens Fielding) 캐나다 재무부 장관과 루이-필립 브로듀르(Louis-Philippe Brodeur) 캐나다 어업, 해양 및 해안 경비대 장관은 프랑스와 일부 상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인하하는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42] 1909년에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의 무역 증진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43]
자유당은 미국과 캐나다가 상호 관세를 철폐하되 정치적 합병은 피하고, 제3국에 대해서는 각자 독자적인 관세를 유지하는 무제한 상호호혜를 내세웠다. 1890년 4월 미국 하원에 제출된 매킨리 관세법안은 캐나다산 농산물 수입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비난 여론이 거세져 자유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71]
5. 2. 1. 영국과의 관계
1897년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1등급(GCMG, 작위급 훈장)을 수여 받았다.[1] 같은 해 빅토리아 여왕 재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1902년 식민지 회의, 1907년, 1911년 제국 회의에 참석했다.[34]1899년 보어 전쟁 발발 당시, 영국 정부는 캐나다에 참전을 요청했다.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참전을 지지했으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반대하여 로리에는 갈등을 겪었다. 결국 로리에는 캐나다 민병대가 아닌 자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여 약 7,000명의 캐나다 군인이 참전했다.[35][36] 앙리 부라사는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주의자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캐나다의 보어 전쟁 참전에 강력히 반대하며 1899년 10월 자유당 의원단을 사퇴했다.[35][36]
1909년 6월 1일, 로리에 정부는 캐나다의 외교 정책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외무부를 설립했다.[37]
1910년에는 캐나다 왕립 해군 창설을 위한 해군법을 제정했다. 이는 영국-독일 해군 군비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영국 해군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해군은 처음에 5척의 순양함과 6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며, 위기 시에는 영국 해군에 종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 모두에게서 반대에 직면했다. 특히, 앙리 부라사는 퀘벡에서 반 로리에 세력을 조직하여 반대했다.[1][38]
5. 2. 2. 알래스카 국경 분쟁
1897년과 1898년, 알래스카(Alaska)-캐나다 국경 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Klondike Gold Rush)로 인해 로리에(Laurier)는 금광에서 해항까지 전 구간 캐나다 영토를 통과하는 루트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이 금이 풍부한 매력적인 곳이었기에 로리에는 국경을 명확히 설정하려는 야망을 더욱 키웠다. 또한 그는 린 운하(Lynn Canal)의 소유권과 유콘(Yukon)에 대한 해상 접근권을 누가 통제할 것인지도 확립하고자 했다. 로리에와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는 차이점을 연구하고 분쟁을 해결할 영국-미국 합동 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1899년 2월 20일에 돌연 종결되었다.[1]그 후 분쟁은 1903년 국제 사법 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 여기에는 미국 정치인 3명(엘리후 루트(Elihu Root),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 조지 터너), 캐나다인 2명(앨런 브리스톨 에일즈워스(Allen Bristol Aylesworth), 루이 아마블 제테(Louis-Amable Jetté)) 그리고 영국인 1명(알버스톤 경(Lord Alverstone), 잉글랜드 대법원장(Lord Chief Justice of England))이 포함되었다. 1903년 10월 20일, 위원회는 다수결(루트, 로지, 터너, 알버스톤 경)로 미국 정부의 주장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캐나다는 포틀랜드 운하(Portland Canal)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섬만을 획득했다. 이 결정은 캐나다에서 미국과 영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로리에는 이를 일시적으로 부추겼다.[1][39]
5. 2. 3. 관세 및 무역
윌프리드 로리에는 미국과의 자유무역을 지지했지만, 미국 정부가 논의를 거부하여 추진하지 못했다.[1][40] 대신 로리에는 보수당의 보호주의적인 국가 정책(National Policy)을 자유당 버전으로 시행하여, 캐나다 상품을 허용하는 국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관세를 인하했다.[1][40]1897년, 로리에 정부는 캐나다 상품을 최소 캐나다 요금과 동등한 요금으로 수입하는 국가에 대해 12.5%의 관세율을 우대적으로 감면하는 영국 제국 내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자유 무역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다.[1]
1907년, 로리에 정부는 관세 제도를 개혁하여 3단계 관세 제도를 도입했다. 기존의 영국 우대 관세와 일반 관세 외에 중간 관세(협상 관세)를 추가하여, 중간 관세는 일반 관세보다 약간 낮게 책정되었다.[41]
같은 해, 윌리엄 스티븐스 필딩(William Stevens Fielding) 캐나다 재무부 장관과 루이-필립 브로듀르(Louis-Philippe Brodeur) 캐나다 어업, 해양 및 해안 경비대 장관은 프랑스와 일부 상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인하하는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42] 1909년에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의 무역 증진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43]
자유당은 미국과 캐나다가 상호 관세를 철폐하되 정치적 합병은 피하고, 제3국에 대해서는 각자 독자적인 관세를 유지하는 무제한 상호호혜를 내세웠다. 1890년 4월 미국 하원에 제출된 매킨리 관세법안은 캐나다산 농산물 수입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비난 여론이 거세져 자유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71]
5. 3. 선거 승리
로리에는 1900년, 1904년, 1908년 총선에서 자유당을 세 번 연속 승리로 이끌었다. 1900년과 1904년 선거에서는 득표율과 의석 수가 증가했지만, 1908년 선거에서는 소폭 감소했다.
5. 3. 1. 퀘벡의 확고한 지지 기반
1800년대 후반, 윌프리드 로리에는 퀘벡에서 캐나다 자유당의 확고한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퀘벡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보수당의 텃밭이었으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영국계 캐나다인의 반프랑스계, 반가톨릭 정서에 반발하면서 자유당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다. 특히, 보수당이 오렌지맨과 연계된 것에 대한 반감이 컸다.[44] 이러한 요인들과 퀘벡 보수당의 붕괴는 로리에가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캐나다 전역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퀘벡의 가톨릭 사제들은 신자들에게 자유당에 투표하지 말 것을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그들은 "le ciel est bleu, l'enfer est rouge프랑스어" ("하늘은 파랗고, 지옥은 붉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이는 보수당의 상징색이 파란색이고 자유당의 상징색이 붉은색임을 이용한 것이었다.[45][46] 이러한 종교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리에는 퀘벡에서 꾸준한 지지를 얻었다.
5. 4. 상호 호혜와 패배
1911년, 로리에 총리가 미국과의 무역 상호호혜를 지지하면서 논란이 일었다.[1][47] 그의 오랜 재무장관인 윌리엄 스티븐스 필딩은 천연자원의 자유 무역을 허용하고 관세를 인하하는 협정을 체결했다.[1] 이는 캐나다 서부 농업계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자유당 기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많은 사업가들을 소외시켰다.[1] 보수당은 상호호혜가 영국과의 유대 약화와 미국 주도의 캐나다 경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1][47]자유당이 내세운 무제한 상호호혜는 미국과 캐나다가 상호 관세를 철폐하지만, 정치적 합병은 피하고 제3국에 대해서는 각자 독자적인 관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1890년 4월 미국 하원에 제출된 매킨리 관세법안은 캐나다산 보리, 밀, 옥수수 수입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자유당에게는 호재가 되었다.[71]
로리에는 상호 호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선을 실시했으나,[1] 보수당에게 패배하고 15년간의 집권이 막을 내렸다.[1] 보수당 당수 로버트 레이어드 보든이 로리에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1]
1910년에 1차 산업 제품을 거의 모두 면세, 제조품 면세는 강판과 철조망으로만 하는 상호 호혜 관계에 대한 합의를 미국과 보았다.[73] 그러나 호혜의 확대와 경쟁 심화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어 기업가와 농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73] 로리에는 이러한 안건들을 성립시키기 위해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1911년 9월 21일, 그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66]
6. 야당과 전쟁 (1911–1919)
로리에는 자유당 대표직을 유지하며 야당을 이끌었다.[1] 1912년 보수당의 해군 법안(영국 해군 지원을 위한 예산 배정)에 반대하며 필리버스터를 통해 법안 통과를 저지했다. 이 법안이 캐나다의 자치권을 위협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1] 상원에서 이 법안은 결국 부결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로리에는 자원군 파병을 지지하며 적극적인 자원병 모집 운동을 펼쳤다.[1] 비미 능선 전투에서 캐나다군이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영국도 캐나다의 독립적인 군대를 인정하게 되었다.[73] 그러나 퀘벡에서의 반발이 거세어 캐나다의 통합을 위협할 수 있는 징병제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66]
1917년 징병 위기 당시, 로리에는 징병에 반대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했다.[1] 징병 찬성 자유당원들이 로버트 보든 총리와 함께 자유 연합주의자로 연합 정부를 구성하자, 로리에는 징병에 반대하는 자유당원들로 구성된 '로리에 자유당'을 결성했다.[1] 보든 총리의 연립 정부 구성 제안을 거부했는데, 이는 퀘벡이 소외되고 프랑스계 캐나다의 급진적인 민족주의자 앙리 부라사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48]
1917년 캐나다 연방 선거에서 로리에 자유당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중심의 잔당으로 축소되었으나, 퀘벡에서 65석 중 62석을 석권하며 징병 반대에 대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지지를 확인했다.[1][49] 징병 위기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로리에는 영국계 캐나다인들에게는 '반역자'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여겨졌다.[1]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로리에는 자유당 재건과 통합에 힘썼다.[1][49] 이러한 징병제를 둘러싼 대립은 퀘벡 분리 독립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73]
7. 사망
윌프리드 로리에는 1919년 2월 17일 야당 대표직을 수행하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50] 2년 전 선거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따뜻한 미소, 세련된 감각, 그리고 밝은 태도"로 전국적인 사랑을 받았다.[50] 그의 장례 행렬이 노트르담 묘지(Notre-Dame Cemetery)에 있는 그의 최종 안식처로 향하면서 5만 명에서 10만 명의 사람들이 오타와 거리를 가득 메웠다.[1][51][52] 그의 유해는 9개의 애도하는 여성 조각상(연방에 속한 각 주를 대표)으로 장식된 석관에 안치되었다.[1] 그의 아내인 조에 로리에는 1921년 11월 1일에 사망하여 같은 묘에 안치되었다.[1]
로리에는 자유당 당수직을 그의 전직 노동부 장관인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에게 물려주었다.[42] 킹은 로리에의 전직 재무부 장관인 윌리엄 스티븐스 필딩을 근소한 차이로 물리쳤는데, 조에에 따르면 필딩은 로리에가 다음 당수로 선택한 인물이었다고 한다.[42] 로리에는 필딩이 당의 통합을 회복할 가장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42]
8. 유산
로리에는 영어권 캐나다인과 프랑스어권 캐나다인 사이의 중립을 유지하고 화합을 추구한 총리로 평가받는다.[34]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지만, 매니토바 주의 가톨릭 학교 공립 지원 금지 철폐 요구와 보어 전쟁 파병 거부 요구를 완전히 수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8년과 1984년을 제외하고 자유당은 퀘벡의 연방 정치를 장악했다.[34]
자크 모네는 로리에를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으로 묘사하며, 그의 집권 기간을 캐나다 역사상 행복한 시대로 평가했다. 그는 개인적인 매력, 품위, 뛰어난 연설 솜씨, 지적 재능으로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로 기억된다.[34]
2011년 역사가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로리에는 존 A. 맥도널드와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을 제치고 최고의 캐나다 총리로 선정되었다.[55] J.L. 그래너스타인과 노먼 힐머가 저술한 ''총리들: 캐나다 지도자들의 순위''에서 로리에는 3위를 차지했다.[55] 팀 쿡은 로리에를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며, 두 언어 모두에 정통한 지적인 힘"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55][56]
최근에는 원주민과 중국 및 인도 이민자에 대한 그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20]
9. 인정
로리에는 캐나다 국립사적지 세 곳에 기념되고 있다.[57] 윌프리드 로리에 국립사적지는 그의 출생지인 퀘벡주 생린로렌티드에 있으며, 1930년대에 로리에를 위한 사당을 조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하여 그의 초기 삶을 기리고 있다.[57] 오타와에 있는 로리에의 벽돌집은 로리에 하우스 국립사적지로 알려져 있으며, 로리에 부부가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총리에게 유언으로 남겼고, 그는 사망 후 캐나다에 기증했다. 빅토리아빌에 있는 이탈리아풍 저택은 윌프리드 로리에 하우스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사유지로 소유되어 로리에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58][59][60] 이 세 사적지는 모두 캐나다 공원청이 국립공원 시스템의 일부로 관리하고 있다.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교는 2011년 11월,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젊은 윌프리드 로리에를 묘사한 동상을 공개했다.[61]
로리에는 1897년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1등급(GCMG, 작위급 훈장)을 받아 "경(Sir)"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62] 1877년에는 캐나다 국왕의 비밀참사회 회원이 되어 "존경하는(The Honourable)"이라는 호칭과 "PC"라는 약칭을, 1897년에는 영국 국왕의 비밀참사회 회원이 됨으로써 "우뚝 솟은 존경하는(The Right Honourable)"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1902년에는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LL.D.) 학위와 에든버러 시의 자유 시민 자격을 받았다.[63]
매년 11월 20일은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윌프리드 로리에의 날(Sir Wilfrid Laurier Day)'이다.[64] 로리에는 캐나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여러 지폐에 등장하는데, 1935년과 1937년 시리즈의 1,000달러 지폐, 1972년부터 2013년까지 발행된 5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이 등장한다. 또한 1927년과 1973년에 발행된 최소 세 종류의 우표에도 등장한다.
로리에를 기리는 많은 장소와 랜드마크가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롭슨산 근처 프리미어 산맥의 최고봉인 로리에산(Mount Sir Wilfrid Laurier),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의 윌프리드 로리에 초등학교, 온타리오주 밀턴의 로리에 애비뉴, 퀘벡주 쇼위니건의 로리에 애비뉴, 퀘벡주 몽로리에, 온타리오주 브록빌의 로리에대로와 로리에 언덕, 퀘벡주 몬트리올의 로리에 애비뉴, 퀘벡주 퀘벡시티의 로리에대로, 온타리오주 오타와의 로리에 애비뉴, 온타리오주 딥 리버의 로리에 애비뉴, 온타리오주 노스베이의 로리에 스트리트, 온타리오주 카셀만의 로리에 거리, 온타리오주 록랜드의 로리에 거리, 앨버타주 에드먼턴의 로리에 하이츠 지역(로리에 드라이브와 로리에 하이츠 스쿨 포함), 사스카툰의 연방 공원 지역의 로리에 드라이브, 로리에-도리옹 주 선거구, 로리에-생트마리 연방 선거구,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교, 로리에역(몬트리올 지하철), CCGS 시어 윌프리드 로리에, 샤토 로리에, 온타리오주 마캄의 윌프리드 로리에 공립학교, 퀘벡주의 윌프리드 로리에 학교 위원회, 온타리오주 런던의 윌프리드 로리에 고등학교, 온타리오주 오타와의 윌프리드 로리에 고등학교, 온타리오주 토론토 스캐버러의 윌프리드 로리에 종합고등학교 등이 있다.
10. 대법원 임명
윌프리드 로리에는 캐나다 총독(Governor General of Canada)에게 다음 인물들을 캐나다 대법원(Supreme Court of Canada) 판사로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
- 르이 앙리 데이비스 경(Sir Louis Henry Davies) (1901년 9월 25일 ~ 1924년 5월 1일)
- 데이비드 밀스(David Mills) (1902년 2월 8일 ~ 1903년 5월 8일)
- 앙리 엘제아르 타셰로 경(Sir Henri Elzéar Taschereau) (1902년 11월 21일 ~ 1906년 5월 2일, 대법원장 역임; 알렉산더 매켄지(Alexander Mackenzie) 총리 재임 시절인 1878년 10월 7일에 대법관(Puisne Justice)으로 임명됨)
- 존 더글러스 아머(John Douglas Armour) (1902년 11월 21일 ~ 1903년 7월 11일)
- 월리스 네스빗(Wallace Nesbitt) (1903년 5월 16일 ~ 1905년 10월 4일)
- 앨버트 클레먼츠 킬람(Albert Clements Killam) (1903년 8월 8일 ~ 1905년 2월 6일)
- 존 아이딩턴(John Idington) (1905년 2월 10일 ~ 1927년 3월 31일)
- 제임스 맥레넌(James Maclennan) (1905년 10월 5일 ~ 1909년 2월 13일)
- 찰스 피츠패트릭 경(Sir Charles Fitzpatrick) (1906년 6월 4일 ~ 1918년 11월 21일, 대법원장 역임)
- 라이먼 푸어 더프 경(Sir Lyman Poore Duff) (1906년 9월 27일 ~ 1944년 1월 2일)
- 프랜시스 알렉산더 앵글린(Francis Alexander Anglin) (1909년 2월 23일 ~ 1933년 2월 28일)
- 루이-필립 브로듀르(Louis-Philippe Brodeur) (1911년 8월 11일 ~ 1923년 10월 10일)
11. 대중 문화
12. 선거 기록
윌프리드 로리에의 상세한 선거 기록은 윌프리드 로리에의 선거 이력 문서를 참고한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874년 선거 | 하원의원 (드럼몬드-아르타바스카 선거구) | 3대 | 캐나다 자유당 | 53.57% | 1,786표 | 1위 | |
1877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3대 | 캐나다 자유당 | 54.62% | 1,863표 | 1위 | 25px |
1878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4대 | 캐나다 자유당 | 62.49% | 1,946표 | 1위 | 25px |
1882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5대 | 캐나다 자유당 | 57.70% | 1,750표 | 1위 | 25px |
1887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6대 | 캐나다 자유당 | 79.05% | 2,622표 | 1위 | 25px |
1891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7대 | 캐나다 자유당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25px |
1896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8대 | 캐나다 자유당 | 76.00% | 3,202표 | 1위 | 25px |
1896년 선거 | 하원의원 (서스캐처원 선거구) | 8대 | 캐나다 자유당 | 46.06% | 988표 | 1위 | 25px |
1896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8대 | 캐나다 자유당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25px |
1900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9대 | 캐나다 자유당 | 81.33% | 3,598표 | 1위 | 25px |
1904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0대 | 캐나다 자유당 | 71.35% | 3,524표 | 1위 | 25px |
1904년 선거 | 하원의원 (라이트 선거구) | 10대 | 캐나다 자유당 | 61.39% | 3,250표 | 1위 | 25px |
1908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1대 | 캐나다 자유당 | 70.83% | 3,764표 | 1위 | 25px |
1908년 선거 | 하원의원 (오타와 선거구) | 11대 | 캐나다 자유당 | 26.53% | 6,584표 | 1위 | 25px |
1911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2대 | 캐나다 자유당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25px |
1911년 선거 | 하원의원 (쑬렁쥬 선거구) | 12대 | 캐나다 자유당 | 53.64% | 1,045표 | 1위 | 25px |
1917년 선거 | 하원의원 (퀘벡 이스트 선거구) | 13대 | 캐나다 자유당 | 92.53% | 6,957표 | 1위 | 25px |
참조
[1]
웹사이트
Wilfrid Laurier
http://www.biographi[...]
2022-01-01
[2]
백과사전
Wilfrid Laurier
https://www.thecanad[...]
2019-09-07
[3]
웹사이트
PRIME MINISTERS OF CANADA THEIR MILITARY CONNECTIONS, HONOURS and MEDALS
https://www.blatherw[...]
2023-04-04
[4]
웹사이트
Canadian Army List: Independent Companies
https://books.google[...]
Government of Canada
2023-04-04
[5]
웹사이트
Election 1891: A Question of Loyalty
https://www.thecanad[...]
2011-02-01
[6]
웹사이트
Election of 1896
https://www.thecanad[...]
2013-06-20
[7]
판례
City of Winnipeg v Barrett
1892
[8]
뉴스
Justin Trudeau's 'sunny ways' a nod to Sir Wilfrid Laurier
http://www.cbc.ca/ne[...]
CBC News
2015-10-20
[9]
웹사이트
Controversy and Compromise over the Manitoba Schools Question
https://www.canadash[...]
2011-10-03
[10]
웹사이트
National Transcontinental Railway
https://www.thecanad[...]
2006-02-07
[11]
뉴스
Hugh Ryan Dead: Toronto 13 February Notice
https://www.newspape[...]
Free Press Prairie Farmer
1899-02-16
[12]
뉴스
Hugh Ryan's Funeral: Impressive services held at St Michael's Cathedral
https://www.newspape[...]
The Manitoba Morning Free Press
1899-02-15
[13]
웹사이트
Alberta and Confederation
https://www.thecanad[...]
2014-11-18
[14]
웹사이트
Canadian Confederation: Alberta and Saskatchewan Entered Confederation: 1905
http://www.collectio[...]
2011-12-14
[15]
웹사이트
Yukon Historical Timeline (1886–1906)
http://www.gov.yk.ca[...]
2011-12-14
[16]
웹사이트
ABORIGINAL PEOPLES AND THE 1995 QUEBEC REFERENDUM: A SURVEY OF THE ISSUES
http://www.parl.gc.c[...]
1996-02-00
[17]
웹사이트
Great Period of Immigration in Canada
https://wilfridlauri[...]
2016-10-00
[18]
논문
Racisms: The reactions to Chinese migrants in Canada at the turn of the century
1989
[19]
논문
Laurier, Borden and a White British Columbia
1977
[20]
서적
Canadian Liberalism and the Politics of Border Control, 1867-1967
https://books.google[...]
UBC Press
[21]
웹사이트
The Chinese Immigration Act, 1885
http://www.pier21.ca[...]
2015-10-14
[22]
논문
Rereading Chinese head tax racism: redress, stereotype, and antiracist critical practice
2002
[23]
서적
China's Open Door Policy: The Quest for Foreign Technology and Capital : a Study of China's Special Trade
https://books.google[...]
UBC Press
[24]
웹사이트
Is racism a Canadian value?
https://www.macleans[...]
2019-07-31
[25]
뉴스
As America debates Confederate monuments, Canada faces its own historical controversy
https://www.washingt[...]
2019-07-31
[26]
뉴스
Sure, John A. Macdonald was a racist, colonizer and misogynist — but so were most Canadians back then
https://nationalpost[...]
2019-07-31
[27]
웹사이트
Who was Sir Wilfrid Laurier?
https://www.wlu.ca/a[...]
2022-12-06
[28]
백과사전
The proposed ban on black immigration to Canada. Order-in-Council P. C. 1911-1324
https://www.thecanad[...]
2019-09-07
[29]
웹사이트
Lord's Day Alliance of Canada
https://www.thecanad[...]
2006-02-07
[30]
웹사이트
Sunday Shopping
https://www.thecanad[...]
2007-01-25
[31]
웹사이트
They're Fighting To Save What's Left of Sunday
https://archive.macl[...]
1955-02-15
[32]
학술지
The Canadian Industrial Disputes Act
https://www.jstor.or[...]
2022-10-03
[33]
서적
Monthly Labor Review Volume 48, Issue 1 1939, P.70
https://books.google[...]
1939
[34]
웹사이트
Wilfrid Laurier
https://www.britanni[...]
2022-01-30
[35]
웹사이트
The Boer War
https://www.cbc.ca/h[...]
2021-12-16
[36]
웹사이트
Henri Bourassa
https://www.thecanad[...]
2008-01-16
[37]
웹사이트
Global Affairs Canada throughout the decades
https://www.internat[...]
2018-09-12
[38]
백과사전
Wilfrid Laurier
https://www.thecanad[...]
[39]
웹사이트
Alaska Boundary Dispute
https://www.thecanad[...]
2006-02-06
[40]
서적
Destinies: Canadian History Since Confederation, Sixth Edition
Nelson Education
[41]
웹사이트
History of Tariffs in Canada
http://faculty.maria[...]
[42]
웹사이트
FIELDING, WILLIAM STEVENS
http://www.biographi[...]
[43]
웹사이트
BRODEUR, LOUIS-PHILIPPE (baptized Louis-Joseph-Alexandre; Philippe)
http://www.biographi[...]
[44]
서적
Loyalisme et fanatisme: petite histoire du mouvement orangiste canadien
Éditions du Québécois
[45]
저널
Bleu, histoire d'une couleur politique
https://www.erudit.o[...]
2018
[46]
서적
Sir Wilfrid Laurier and the Romance of Canada
https://archive.org/[...]
Stoddart
[47]
백과사전
Wilfrid Laurier
https://www.thecanad[...]
[48]
뉴스
Quebec nationalism and anti-militarism legacy of conscription crisis: historians
https://www.ctvnews.[...]
2017-04-19
[49]
백과사전
Wilfrid Laurier
https://www.thecanad[...]
[50]
웹사이트
CBC Archives
http://archives.cbc.[...]
[51]
웹사이트
Laurier's Sunny Ways
https://www.canadash[...]
2016-11-10
[52]
뉴스
Thousands Mourn Laurier. Eulogies in French and English at Funeral of Ex-Premier
https://query.nytime[...]
1919-02-23
[53]
서적
Types of Canadian Women and of Women who are or have been Connected with Canada
https://archive.org/[...]
Williams Briggs
1903
[54]
웹사이트
Réal Bélanger, Macdonald and Laurier Days
http://www.macdonald[...]
[55]
저널
Canada's Best Prime Ministers
2011-06-20
[56]
웹사이트
Canada's best prime ministers
https://www.macleans[...]
2011-06-10
[57]
서적
Negotiating the Past: The Making of Canada's National Historic Parks and Sites
[58]
웹사이트
Musée Laurier
http://www.museelaur[...]
[59]
CRHP
Wilfrid Laurier House National Historic Site of Canada
[60]
DFHD
Wilfrid Laurier House
[61]
뉴스
The Cord Newspaper
[62]
웹사이트
Historical Chronological List Since 1867 of Members of the Queen's Privy Council for Canada
http://www.pco-bcp.g[...]
Privy Council Office (Canada)
[63]
뉴스
The Colonial Premiers in Edinburgh
1902-07-28
[64]
법률
Sir Wilfrid Laurier Day Act
http://laws.justice.[...]
[65]
웹사이트
Canada is Civ 6’s latest arrival, and they’re too nice to declare surprise wars.
https://www.pcgamesn[...]
[66]
웹사이트
Laurier, Sir Wilfrid - The Canadian Encyclopedia
http://www.thecanadi[...]
[67]
웹사이트
Sir Wilfred Laurier Biography
http://canadaonline.[...]
[68]
웹사이트
Office of the Superintendent of Bankruptcy Canada
http://www.ic.gc.ca/[...]
[69]
웹사이트
Laurier: The First canadian - The Canadian Encyclopedia
http://www.thecanadi[...]
[70]
웹사이트
Wilfred Laurier: A Canadian Statesman
http://www.mackinac.[...]
[71]
서적
世界各国史 23 カナダ史
山川出版社
1999
[72]
웹사이트
Sir Wilfrid Laurier, information, pictures | Encyclopedia.com articles about Sir Wilfrid
http://www.encyclope[...]
[73]
서적
世界各国史 23 カナダ史
山川出版社
1999
[74]
서적
新版 史料が語るカナダ 1535-2007
有斐閣
2008
[75]
웹사이트
Wilfrid Laurier (Civ6)
https://civilizatio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